어렸을 적 외식이라고 하면 짜장면, 짬뽕, 그리고 냉면이 전부였던 나에게, 누나들이 대학에 다닐 때 처음으로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를 맛보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그리고 순대를 좋아하긴 했지만, 순대가 들어간 국밥은 별로 끌리지 않아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가을 한국 여행에서 우연히 접한 순대국의 맛에 푹 빠져버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추천 글까지 쓰게 될 줄이야.
에어프리미아 항공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8시였다.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라서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 몸과 큰 짐 때문에 정말 난감했다. 다행히 숙소 1층에 짐을 맡길 수 있다고 해서 그곳에 짐을 두고, 독립문 근처 세란병원에서 EJ의 건강검진을 받으러 발길을 옮겼다. 병원은 작년과 비교해서 두배로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에 있는것 같았다. 아마도 “의료대란”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EJ는 건강검진 때문에, 나는 비행기 멀미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은 상태였다. EJ가 의사와 면담하러 들어가면서 한 네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고, 나는 멀미로 힘든 속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하던 중 우연히 독립문 영천시장에서 석교식당을 발견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곧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둘러보니, 앞면과 뒷면 벽이 유명인들, 특히 알만한 정치인들의 사진과 사인으로 가득 차 있어 이곳이 꽤 유명한 맛집임을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음식을 나르고, 한 손님이 본인이 먼저 주문했는데 옆 사람이 먼저 음식을 받았다고 불평하는 모습에서 옛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주문한 순대국이 부추김치, 투박한 깍두기, 새우젓 소스, 된장, 그리고 풋고추 두 개와 함께 나왔다. 속이 뒤집어져 있는 상황이라 국물을 한 숟가락 넣어보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뜨거우면서도 정말 맛있었다. 이런 맛일 줄은 정말 몰랐다. 깔끔하고 깊은 맛의 국물이 뒤집힌 내 속을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하얀 공기밥을 순대국에 휘휘 저어 부추김치와 새우젓 소스를 조금 곁들였다. 탱탱한 순대와 어떤 부위인지 모르는 쫄깃한 돼지고기가 입에 한가득 들어왔다. 몇점 안되는 깍두기가 너무 잘어울려서 조금씩 아껴 먹어야 했다. 입천장을 살짝 데었지만 만족스러워서 상관없었다. 가격은 만이천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새 몸에서 땀이 조금 나며 속이 편안해졌고 오랜 비행의 여독이 풀린 듯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이제 되돌아온 속과 몸을 대견하게 생각하며 걸어가다가 설탕 꽈배기 한 봉지를 사서 독립문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독립문 광장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따뜻한 9월 말 오후의 햇살은 더 이상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