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마치 빠름의 미학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 부부에게 한국의 신속함, 친절함, 그리고 저렴함은 언제나 신선함 그 자체였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듯 보였고, 어디를 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의 친절함에 낯선 땅의 외로움은 이내 녹아내리곤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장점들이야말로 우리가 한국을 찾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었다.
인천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시간은 고작 30분. 미국 같았으면 한 두 시간은 족히 걸렸을 일이다. 택시는 친절했고, 호텔 체크인은 스마트폰 하나로 끝났다. 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은 바빴지만 질서정연했다. 이런 게 바로 선진국이구나, 싶었다.
디지털 천국의 아이러니
한국의 디지털 인프라는 정말 놀라웠다. 카카오톡 하나면 택시도 부르고, 음식도 주문하고, 송금까지 해결됐다. 지하철은 5분마다 도착했고, 배달 음식은 30분이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 온 우리에게 이런 효율성은 거의 마법처럼 느껴졌다. 모든 게 앱으로 연결되고, 모든 게 빨랐다.
그러나 나같은 외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막상 일상적인 것들을 해결하려 하니 벽에 부딪혔다. 첫날부터였다. 지하철을 타려고 T-머니 카드를 사려는데, 편의점 직원이 말했다. “현금만 됩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2025년인데? 애플페이로 커피도 사고 택시비도 내는 나라에서 교통카드는 현금으로만 산다니. 지갑을 뒤져 구겨진 만원짜리를 꺼내는 내 모습이 어쩐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장벽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집사람과 함께 영화를 보려고 예매를 시도했다. 인터넷 예매는 당연히 안 됐다. 본인 인증이 필요한데,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니 불가능했다. 극장 매표소에 직접 가야 했다.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온라인으로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시스템이 우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KTX 예매는 더 난감했다. 코레일 앱은 외국 신용카드를 거부했고, 웹사이트는 계속 오류 메시지만 뱉어냈다. 결국 서울역에 가서 줄을 섰다. 부산까지 가는 표를 예매하기위해 숙소에서 매표소로 그리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정작 부산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3시간 남짓이다. 재작년에 조카가 스마트폰으로 쓱쓱 예매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한국 국민에게는 열린 문이 우리에게는 굳게 닫혀 있다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쿠팡이나 이마트 오프라인 몰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주문하려 했지만 회원가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휴대폰 인증, 본인 확인, 주민번호… 단계마다 우리를 밀어내는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외국인에게는 애초에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도대체 왜?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보안 때문일까? 사기 방지? 아니면 세금 문제?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보안 및 금융 사기 방지 (자금세탁 방지), 내국인 중심의 시스템 관행 그리고 카드 수수료의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 기회에 좀더 자세히 다루어 보기로 하자.
만약 세금이나 금융사기 문제라면, 100억, 1000억씩 탈세하는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먼저 잡는 게 순서 아닌가 싶었다. 한 달 여행 온 외국인이 T-머니 카드 하나 사는 걸 막는다고 세수가 늘어날까? 영화표 예매를 온라인으로 못 하게 한다고 탈세가 막아질까? 큰 구멍은 그대로 둔 채 작은 틈새만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한국이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하겠다고 엄청난 예산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K-드라마, K-팝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와보면 일상적인 것 하나하나가 장애물이었다. 이건 한 손으로 환영하면서 다른 손으로 밀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빛나는 쇼윈도 뒤에 닫힌 문들이 즐비했다.
옵션들
그래도 몇가지 방법은 있다. 6개월 이상 체류한다면 외국인등록증을 받아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처럼 한 달 정도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짧은 여행객들은 그냥 불편함을 감수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생존 전략이 생겼다. 현금은 넉넉히 준비했다. T-머니 카드뿐 아니라 의외로 카드가 안 되는 곳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나 공연은 미리 현장 구매 시간을 고려해서 일정을 짰다. 인터넷 예매가 안 된다는 걸 알고 나니 계획이 달라졌다. KTX는 역에서 직접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았다. 앱과 씨름하느니 역무원과 얘기하는 게 더 빨랐다. 필요한 물건은 온라인을 포기하고 오프라인 매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한국은 빠르게 변하는 나라였다. 10년 전만 해도 신용카드 해외 결제가 안 되던 식당들이 이제는 애플페이를 받았다. 변화의 속도를 생각하면, 언젠가는 외국인들도, 짧은 여행객들도 불편 없이 한국의 편리함을 100%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디지털 인프라가 이렇게 발달한 나라인데, 못 할 리 없었다.
그때까지는 우리가 좀 더 준비하고, 이해하고, 적응해야 할 것 같았다. 불편함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고향 같은 곳에서 손님 취급받는 기분은 여전히 씁쓸했다. 반은 안이고 반은 밖인 이 애매한 위치가 가끔은 외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