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이른 아침, 게스트하우스 주인 아저씨가 조그마한 상에 흑임자죽과 딸기잼 빵을 아침으로 차려 주셨다. 전주에서의 1박 2일을 주인 아저씨의 정성 어린 아침으로 마무리하며 우리는 서둘러 전주 전동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서 Uber 앱으로 택시를 불러 전주 버스 터미널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참고로 한국에서 택시를 부를 때 UT앱이 생각보다 편리했다 (한국에 도착하면 Uber가 UT로 바뀐다). 특별히 새로운 앱을 다운받을 필요도 없고 미국에서 사용하듯이 한국에서도 이용 가능했다. 가격도 미국에서 만큼 부담스럽지 않았다.

전주 버스 터미널은 아담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버스표를 구매하기 위해 매표소를 찾았지만, 키오스크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산행 버스표 두 장을 끊으려는데, 나조차도 약간 버벅거릴 정도로 키오스크 사용이 용이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양복에 구두, 모자까지 갖춰 입은 깔끔한 차림의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신사 한 분이 키오스크 앞에서 30분 넘게 쩔쩔매고 계셨다. 내가 헤맸던 바로 그 부분에서 막히신 듯, 초기 화면으로 돌아가기를 수십 번 반복하고 계셨다. 도와드릴까 망설이던 찰나, 덩치가 좋은 다른 분이 나타나 신사분을 대신해 키오스크를 조작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기기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소외 계층이 의외로 많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흑임자죽으로 아침 식사가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EJ와 나는 터미널 대합실 2층에 있는 이삭토스트에서 간단히 아침을 더 먹기로 했다. 1인당 5천 원에서 6천 원 정도의 가격으로 토스트와 커피를 즐긴 후, 우리는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릴 적에는 서울에서 부산을 자주 오갔지만, 전주에서 출발하는 부산행은 처음이었다. 3시간 넘게 걸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흔히 한국의 영토가 좁다고들 하는데,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결코 작은 편은 아니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국이 결코 ‘코딱지만 한’ 땅덩어리는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부산 서부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광안리에 있는 호텔로 갈까 생각하다가, 부산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쓰던 교통카드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편리했고, 광안역에서 호텔까지 15분 정도 걸어가는 동안 부산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광안리에 예약한 호텔은 정면으로 탁 트인 오션뷰를 자랑하듯, 광안리 해수욕장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늘 카펫이 깔린 호텔 바닥만 보다가 매끈한 비닐 소재 Floor를 처음 보니 낯설면서도 오히려 더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짐을 대충 정리한 우리는 곧바로 바닷가로 향했다. 계절에 상관없이 바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설레임을 안겨준다. 특히 10월이라 한적한 광안리 바다를 마음껏 누릴 수 있어서 더욱 설렜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해변가의 번화한 상권과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온사인 불빛, 그리고 음악 소리에 어서 빨리 해가 지기를 바랬다.

아침을 두번 먹고 점심은 건너 뛴 터라, 배 속에서 “먹어, 먹으라구!” 컴퓨터보다 정확한 알람이 아우성을 쳤다. 바닷가에 왔으니 당연히 해산물을 먹어야 한다며 EJ가 제안했고, 나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으로는 이른 시각이라 식당들은 대체로 한산했고, 우리가 선택한 횟집 역시 손님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쉽게 접하기 힘든 살아있는 꼼장어 볶음과 광어회 한 접시를 주문했다. 술을 시키지 않자 주인 아주머니가 조금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서비스로 생선찌개도 푸짐하게 내어 주셨다. 그런데 아마도 내가 음식 주문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전주 비빔밥에 이어, 나는 연탄불에 바싹 구워 먹는 꼼장어를 상상했는데, 꼼장어 찌개에 가까운 국물이 자작한 음식이 나왔다. 게다가 꼼장어가 냄비안에 살아서 꿈틀대는 것을 보고 놀랐고 양도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조금 질릴 정도였다 😠. 그래도 다행히 광어회는 신선하고 맛있었다.

어느덧 바다는 어둑해지고 주변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가을 저녁 바다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젊은 연인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혼자 조용히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한적했던 광안리 해변은 해가 지고 나서야 비로소 활기를 되찾은 듯 북적거렸다.

모래사장과 상점가 사이에 조성된 보드웍(Boardwalk)을 따라 한 바퀴 반 정도를 걷고 나니,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우리는 GS25 편의점에서 물, 과자, 아이스크림, 크림빵 등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EJ는 반짝이는 광안대교가 침대에 누워서도 선명하게 보인다며 감탄하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참 잠도 잘 잔다. 나도 멋있는 광안리의 야경을 바라보며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85도를 웃도는 찜통 같은 방 안은 어젯밤의 쾌적함과는 딴판이었다. 광안대교 너머에서 솟아오른 강렬한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떠오르는 해가 정면으로 내리쬐니 더는 잠을 청할 수조차 없었다 🥵. 이번 경험을 통해 오션뷰 호텔을 예약할 때는 반드시 일출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천천히 광안리 해변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차가운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공존하는 10월의 광안리 바다는, 이곳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근처의 아파트 가격을 검색해 보고 가끔 놀러만 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
다음 목적지는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린 시절 외할머니, 엄마와 함께 자갈치시장에서 고래고기를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두 분 모두 다시 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