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 경주의 고즈넉한 아침이 우리를 배웅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국사에서의 숙연한 감동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는 가운데,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여정이 우리를 손짓하고 있었다. EJ와 함께한 이 여행도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마지막까지 알찬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경주에서 출발하여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중, 첫 번째 목적지인 포항 구룡포에 도착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곳이었다. 거리를 걷는 순간, 마치 시간이 뒤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낮은 지붕의 일본식 가옥들이 언덕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건물들은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며 서 있는 것처럼 보였고, 바닷바람에 바랜 목재 외벽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EJ는 조용히 거리를 둘러보며, 미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이런 역사의 현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우리를 과거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당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창문 너머로 스며 나오는 것 같았고,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한 생활의 흔적들이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살아있는 이야기임을 새삼 깨달게 했다.
까멜리아의 무대가 된 바닷가 마을

구룡포에서 조금 더 북상하니 드라마 ‘까멜리아’의 촬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를 Netflix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촬영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정겨워 보였고,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애무하듯 스치며 지나가는 순간, 드라마 속 장면들이 어떻게 탄생했을지 상상하게 됐다. 평범한 어촌 마을이 스크린을 통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배경이 되었다니, 문화 콘텐츠의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EJ 역시 한국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하는 듯 보였고, 미국 친구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여러 장 찍어두었다.
이가리 닻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해

여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는 이가리 닻 전망대였다. 거대한 닻 모양의 전망대에 올라서자, 끝없이 펼쳐진 동해의 장관이 우리를 압도했다. 날씨가 흐려서 아쉬웠지만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은 마치 세상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그 위로 유유히 떠가는 구름들이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이 선사하는 이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해안선의 모습도 장관이었다. 기암괴석들이 파도와 춤추며 만들어내는 자연의 조각품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작은 어선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EJ는 카메라 셔터를 멈추지 않으며 이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듯 보였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아름다운 국토가, 타국에서 온 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의 아쉬움과 그리움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여 드디어 설악산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왔던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곳이었다. 그때는 맑고 차가운 물이 콸콸 흘러내리던 계곡들, 바위틈 사이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들, 그리고 그 소리에 묻혀 들려오던 새들의 지저귐까지 생생했다.

하지만 이번에 마주한 설악산의 모습은 기억 속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계곡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오랜 가뭄 탓인지, 예전에 그토록 풍성하게 흘러내리던 물줄기는 거의 사라져버렸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메마른 돌바닥만이 쓸쓸하게 남아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났는데 그 모습이 너무 달라져 있어서 당황스러운 그런 기분이었다.

본래 계획으로는 흔들바위까지 올라가 보려 했지만, 시간이 우리편을 해주지 않아 아쉽게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J도 흔들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쉬운 마음을 함께 나누어야 했다. “다음에 꼭 다시 와서 흔들바위까지 올라가자”는 약속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지만,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설악산과 현재의 설악산 사이에서 느낀 이 낯선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속초 술빵, 마지막 여행의 달콤한 마침표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속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제대로 된 관광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속초의 명물인 술빵만은 꼭 사가고 싶었다.
속초 시장에서 만난 술빵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부드러운 빵 속에 달콤한 술맛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그 맛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그 특유의 향과 맛에 EJ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사왔어야 했는데!” EJ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며, 나 역시 좀 더 여유 있게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고속버스 시간이 우리를 재촉하는 바람에, 속초의 다른 명소들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고속버스에 앉아 술빵을 하나씩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지난 3주간의 여행을 되돌아보았다. 서울의 번화한 거리에서 시작해서, 부산의 정겨운 시장들, 경주의 천년 고도, 그리고 동해안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각각의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 맛본 음식들, 그리고 함께 나눈 대화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2023년 가을, 그리고 새로운 기대
이렇게 2023년 가을, 3주간의 한국 여행은 이렇 막을 내렸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난 후에 비로소 맞이한 자그마한 여유로 계획했던 여행이다. 특히 EJ와 함께하며 한국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얼마나 독특하고 매력적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변화하는 한국의 모습과 변하지 않는 한국의 정서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한얼닷컴 독자 여러분들도 저희의 여행기를 통해 잠시나마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서를 함께 나누셨기를 바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는 항상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 따뜻한 감정을 함께 느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글을 쓴 보람이 있을 것이다.
2024년 가을 여행기로 다시 찾아뵐 예정이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일상 속에서도 작은 여행의 기쁨을 발견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