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번, 아무 생각 없이 패스트푸드 드라이브스루 앞에 서면 왠지 마음이 가벼워진다. 양복도 없고, 미팅도 없고, 누군가의 눈치도 없는 그 짧은 순간. 종이 봉투 안에서 프렌치 프라이 냄새가 올라올 때, 나는 어느새 40대 아저씨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 그 녀석이 되어 있다.
이번엔 맥도날드와 버거킹 콤보를 나란히 사 와서 비교해 보기로 했다. 진지한 리뷰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 나는 처음부터 버거킹 와퍼 편이었다. 공정한 심판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와퍼가 종이 상자 속에
이번 비교의 출발점은 사실 버거킹의 작은 변화였다. 오랫동안 버거킹은 햄버거를 기름종이에 싸서 포장해왔다. 그 종이 포장 끝을 살짝 펴서 열면 와퍼가 슬며시 얼굴을 내밀던 그 느낌, 은근히 정이 들어 있었는데. 그런데 얼마 전부터 버거킹이 맥도날드처럼 종이 상자에 버거를 담아 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습관이 바뀐 셈이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봤다. 와퍼가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상자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안에서 버거가 뒤집어지거나 찌그러진 흔적이 없었다. 상자 포장이 종이 포장 보다 더 나 것 같았다. 번(Bun)도 예전보다 좀 더 푹신해진 느낌이었다. 깨도 적당히 박혀 있었고, 전체적인 비주얼이 제법 듬직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릴 향의 어른스러운 맛
와퍼의 맛은 변하지 않았다. 불에 구운 패티 특유의 그릴 향이 먼저 를 치고, 양배추의 시원함과 양파의 묵직한 단맛, 그 위로 치즈가 살며시 녹아 들어오는 그 조화. 누군가는 이걸 두고 “어른 버거”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화려하게 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결국엔 남는 맛. 맥도날드 버거가 가끔 어린이처럼 밝고 명랑한 느낌이라면, 와퍼는 말수 적은 어른 같은 버거다. 그게 내 혀에는 훨씬 잘 맞는다.
오래 살다 보면 취향이라는 게 조금씩 변하는 줄 알았다. 먹는 것도, 음악도, 사람도. 그런데 와퍼 앞에서는 달랐다. 이십 년이 넘게 미국에서 살면서도, 첫 입에서 “맞아, 이거야”가 나왔다. 가끔은 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아쉬운 건 프렌치 프라이였다. 좀 축축했다. 씹는 맛이 부족해서 와퍼와 함께 먹기엔 밸런스가 살짝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버거는 어른인데 감자는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았다.
맥도날드가 어른스러워졌다
이번에 맥도날드 쪽은 평소에 잘 시키지 않던 Quarter Pounder with Cheese Deluxe Meal을 골랐다. Big Mac이 맥도날드의 얼굴이긴 하지만, 쿼터파운더가 조금 더 어른 취향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번 시도해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좋았다. 번이 폭신했고, 패티는 미국식 특유의 심심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자극이 없다는 게 단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했다. 한국 사람 입맛에는 조금 Boring할 수 있지만, 미국 친구들이 왜 이 버거를 좋아하는지는 이해가 다. 군더더기 없이 정직한 맛이랄까.
맥도날드의 프렌치 프라이는 역시 믿음직스러웠다. 굵기가 적당하고, 바삭한 식감이 살아 있었다. 와퍼와 버거킹 감자를 놓고 비교하면 프렌치 프라이만큼은 맥도날드의 완승이었다. 버거는 버거킹, 감자는 맥도날드 — 이 조합으로 세트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게 이 세상의 불합리한 점 중 하나다.
5달러짜리 시절이 생각났다
두 콤보를 다 먹고 나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요즘은 패스트푸드 콤보 하나가 15달러 가까이 하는 세상이다. 이민 초창기,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5달러짜리 콤보 앞에서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까르르 웃으며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어도 서툴고 세상이 낯설던 시절인데, 햄버거 앞에서는 뭔가 다 괜찮았던 것 같다.
이민 생활이 길어질수록 거창한 것보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오히려 더 마음에 남는다. 드라이브스루에서 받아 든 종이봉투 한 장이 그 시절의 기억을 불쑥 꺼내 오는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지만, 가끔 한 번씩은 이렇게 추억을 핑계로 먹어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와퍼 사람이다.
여러분의 최애 패스트푸드 콤보는 뭔가요? 댓글로 알려주세요. 혹시 저처럼 “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시는 분 계시면, 그 이야기도 같이 나눠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