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이 끝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매년 같은 고민 앞에 서게 돼요.
냉장고에는 여름 학원 안내문이 붙어 있어요. 받은 메일함엔 SAT prep 등록 마감 안내가 쌓이고, 카톡으로는 “우리 애는 이번 여름에 수학 선행 시작해”라는 메시지가 들어와요. 동네 한인 맘 카페에서는 “7월 등록 마감 임박”이라는 글이 올라오고, 같은 학교 학부모 단톡방엔 어느새 학원 후기가 공유되기 시작해요.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매년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돼요. 보낼까, 말까.
솔직히 말하면, 이 질문이 이렇게 복잡해진 건 내가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쪽에는 “공부 잘하면 다 해결돼”를 믿어 의심치 않던 부모님이 있고, 다른 쪽에는 “아이의 여름을 숨 쉴 수 있게 남겨줘야 한다”는 미국식 육아 철학이 있어요. 이 둘 사이 어딘가에서 내 아이의 여름 스케줄을 결정해야 한다는 게, 매년 6월이 되면 꽤 버겁게 느껴지거든요.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인으로서, 나도 그 압박 속에서 여름을 보냈고, 지금은 그걸 내 아이한테 얼마만큼 물려줄지를 고민하는 중이에요.
내가 보낸 여름, 그때는 몰랐던 것들
사실 나도 여름방학에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이 없어요. 수학 선행, 영어 writing camp, 피아노 레슨, 태권도. 스케줄이 빽빽했고, 그 틈에 가끔 친구들이랑 수영장이나 몰에 가는 게 전부였어요. 동네 한인 친구들도 비슷했어요. 우리 세대 한인들은 알 거예요. “여름에 뭐 해?”라는 질문에 “그냥 놀아”라고 답하는 한인 친구는 별로 없었다는 걸요.
그때는 힘든 줄 몰랐어요.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그게 기준인 줄 알았던 거죠. 부모님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셨고, 나도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갔어요. 어릴 때 우리 부모님은 이 선택을 오래 고민하지 않으셨어요. 학원이 사랑의 방식이었고, 스케줄이 빽빽할수록 자식을 잘 키우는 거라고 믿으셨거든요. 한국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사교육 시장 규모는 약 27조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어요. 미국 내 한인 밀집 지역에도 사실상 그 문화의 축소판이 존재해요. LA, 뉴저지, 버지니아 일대의 한인 학원들은 여름 summer intensive 등록을 3월부터 받고, 5월이면 자리가 마감되는 곳도 많아요.
지금 돌아보면 잃은 것도 있어요. 아무 계획 없이 하루를 보내는 법, 심심함을 그냥 견디는 법, 내가 뭘 좋아하는지 스스로 찾아가는 시간. 그런 것들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됐고, 20대 초반이 돼서야 “내가 진짜 뭘 원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처음 만난 것 같아요. 학원이 채워준 건 분명히 있었어요. 근데 내가 스스로 뭔가를 찾고, 선택하고, 채울 수 있는 능력은 막상 잘 몰랐어요. 채워진 여름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 빈 시간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른이 됐더라고요.
그리고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있어요. 여름 내내 학원을 다니면서도 정작 “내가 이걸 왜 배우는 거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냥 다음 레벨, 다음 시험, 다음 목표. 그 흐름 안에 있으면 질문할 틈이 없어요. 그게 효율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 그 효율이 내 것이 아닌 부모님의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와요. 나는 그 날이 꽤 늦게 왔어요.
학원을 보내는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학원 문화를 통째로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미국 공립학교의 여름방학은 꽤 길어요. 약 두 달 반에서 세 달 가까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이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현상을 “summer learning loss”라고 해요. RAND Corporation의 연구에 따르면, 여름 방학 동안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수학에서 약 한 달치 학습 내용을 잊어버린다고 해요. 특히 집에서 학습 지원을 받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게 이 격차가 훨씬 크게 나타난다는 것도 반복적으로 보고되고 있어요.
이 맥락에서 보면, 여름 학원이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유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에요.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 혹은 학교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주는 프로그램이라면 여름 시간을 나름대로 잘 활용하는 거라고 볼 수 있거든요. 선택이 아이에게서 시작됐다면, 그건 꽤 다른 이야기예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많은 경우 그 판단이 아이의 필요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예요. 이웃 한인 엄마가 “우리 애 이번 여름에 9학년 수학 선행 한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서, 또는 학원 상담사가 “지금 안 하면 늦어요”라는 말에 설득되어서 등록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나도 그랬던 적이 있고요. 비교에서 시작된 결정은 아이가 아닌 내 불안을 달래기 위한 거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을 때가 많더라고요. 학원비를 내면서도 내내 찜찜한 이유가 그거였어요.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왜 보내는가”를 한 번쯤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아이를 위한 결정인지, 아니면 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결정인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어야 어떤 선택을 해도 덜 흔들릴 것 같거든요.
그래서 나는 올해 이렇게 해보기로 했어요
올해는 절충점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방법은 단순했어요. 아이한테 먼저 물어봤어요. “이번 여름에 뭔가 배우고 싶은 거 있어?”라고요. 처음에는 “없어”라고 했다가, 며칠 지나서 “그림 그리는 거 배우고 싶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네 community center에서 하는 미술 클래스를 등록했어요. 주 2회, 한 시간짜리. 수학 선행도 아니고, SAT prep도 아니고, 아이가 원한 수업 하나. 나머지 시간은 최대한 비워두기로 했어요.
비워두는 게 불안하지 않냐고요? 솔직히 말하면, 불안해요. 주변 한인 엄마들 단톡방에서 “7월에 algebra 다 끝냈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거든요. 미국에서 자란 한인으로서, 그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알아요. 그냥 뒤처지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충분히 해주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게 두려운 거예요. 우리 부모님이 그 두려움을 학원으로 해소하셨던 것처럼, 나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근데 막상 내가 엄마가 되니까, 빈 시간 안에서 아이가 채우는 뭔가가 있다는 걸 조금씩 보게 돼요. 심심하다고 했다가 혼자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고, 딱히 할 게 없다고 했다가 책을 집어 들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엄마, 나 이런 생각 했어”라고 말을 꺼내는 순간들이요. 그런 순간들이 학원에서는 생기지 않더라고요. 빈 시간이 있어야 생기는 것들이었어요.
그래도 정답은 모르겠어요. 이 선택이 맞는지, 1년 뒤에 후회하지 않을지. 이중문화 육아가 어려운 게 딱 이 지점이에요. 미국 시스템 안에서 한국식 기대를 품고 아이를 키운다는 건, 두 개의 잣대를 동시에 들고 사는 거거든요. 어느 쪽 기준에도 완전히 맞출 수 없어서, 결국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한국식 기대와 미국식 여름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 세대 한인 부모들은 매년 이 질문을 반복하고 있을 거예요. 집집마다 다를 거고, 아이마다 다를 거예요.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이번 여름 어떻게 하셨어요? 학원 보내기로 했나요, 비워두기로 했나요? 아니면 나처럼 아직도 흔들리는 중인가요? 댓글로 솔직하게 나눠주세요.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거든요. hanurl.com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나눌 수 있으면 해요.



